by 평화마을 posted Oct 19,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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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 원고-미완성-和-교열 완료-211016.hwp

 

殷周 시대의 和.hwp  

* 拙稿 <3. 詩經’>에 이어 <4. 殷周 시대의 >를 넣고, <. 주역의 >는 다른 원고로 처리한다. 이와 같이 拙稿 兩分할 것.

 

그러면 <4. 殷周 시대의 >의 원고를 아래와 같이 입력한다:

 

시대의

 

양계초풍우란 지음, 김홍경 편역 음양 오행설의 연구(서울, 신지서원, 1993) 392~404쪽에서 인용

 

늦어도 殷周 시대에는 이미 가 정치강령의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잡는다. 尙書(書經)』 「堯典(요전)에는 백성이 밝아지며, 만방을 화합케 하신다.”라는 말이 있고, 皐陶模(고요모)에도 같이 공경하고 함께 겸손하여 화합을 이루게 하소서라는 말이 있으며, 無逸(무일)에도 이렇게 하여 만민을 화합케 하였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에서의 는 화목과 협조, 마음과 을 같이 하는 것, 단결의 의미를 지닌다.

춘추전국 시대의 사람들은 개념을 여러 영역에 사용하였다. 예를 들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에 달려 있다. 왜냐하면 상하가 불화하면 비록 안정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위태로워질 것(管子』 「形勢)”이기 때문이다. 나라를 지키는 것도 에 달려 있다. “天時地理의 유리함보다 못하고, 地理의 유리함은 사람들의 화합보다 못하기(孟子』 「公孫丑下)” 때문이다. 군대를 지휘하는 것도 에 달려 있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화합에 달려 있지 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기(春秋左氏傳』 「桓公11)” 때문이다. 을 다스리는 것도 에 달려 있다. “군중들은 그들과 화합하지 못하는 군주에게는 모이지 않기(逸周書』 「度訓)” 때문이다. 이외에도 가정에는 화목화친이 필요하고,(荀子』 「樂論) 남을 위해서도 화기롭고 기쁜 모습(荀子』 「王制)”을 지녀야 하며, 사람의 몸도 혈기가 화평해야 하고(禮記』 「樂記)”, 음악을 연주할 때에도 음과 소리가 서로 조화되어야 하고(老子2)”, 요리를 할 때에도 다섯 가지 맛을 조화시켜 입맛을 조절하여야(國語』 「鄭語)” 한다. ‘개념의 광범위한 유행은 그것의 함의를 점점 풍부하게 하였고, 하나의 철학 범주로 승화시켰다. 춘추전국 시대의 범주의 발전은 他和說(타화설), 否和說(부화설), 中和說(중화설) 등의 단계를 거친다.

 

西周(서주) 시대 말기 사백은 이렇게 말한다:

“(나라는) 십중팔구 망하게 될 것입니다. 泰誓(태서)에 이르기를 백성들이 원하는 것은 하늘이 반드시 따른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나라의 왕은 고명하고 밝은 덕을 가진 사람을 버리고 간특하고 우매한 사람을 좋아하며, 콧등이 높고 볼이 탐스러운 사람을 미워하고 완고하고 비루한 사람을 가까이하고 있습니다. 조화를 버리고 자기에게 동조하기만을 구하는 것입니다. 무릇 조화야말로 실제로 사물을 낳는 근거이며, 완전히 동일하면 생산이 계속되지 않습니다. 다른 것[]과 다른 것이 평정을 이루는 것을 조화라고 하니 그 때문에 만물은 풍요롭게 생장하고 백성들이 복종하는 것입니다. 만약 같은 것을 같은 것에 더하면 그것이 다했을 때에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습니다.그러므로 왕은 구억의 땅에 거하여서 천만의 수입을 거두어들이고, 백만 명의 백성을 먹여 살리며, 백성들을 두루 교화시켜서 잘 이용하니 그 때문에 조화와 즐거움이 한집안 같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이 조화의 지극함입니다. 그래서 선왕은 황후를 다른 성씨에게서 맞아들이고, 재물은 다른 지방에서 구하며, 신하를 뽑을 때에는 諫言(간언)하는 신하를 뽑아 많은 사물을 화합케 하였으니 조화에 힘쓴 것입니다.나라의 왕은 이러한 것을 버리고 부화뇌동만을 일삼는다고 하니 그것은 하늘이 그의 총명함을 빼앗을 것입니다. 망하지 않으려고 한들 가능하겠습니까.”(國語』 「鄭語)

 

현존하는 중국철학사 사료를 통해 볼 때 을 대립시키고 철학적 범주로 만든 것은 사백에게서 시작된 일로 보인다. 사백은 을 반대하고 를 긍정하였다. ‘는 무엇인가? “다른 것과 다른 것이 평정을 이루는 것”, 곧 상이한 성질이 배합되고 평형을 이루는 것이 이다. 여기에서의 다른 것다른 것끼리의 조화이다. 그래서 나는 에 관한 사백의 사상을 他和說로 개괄한다. ‘의 철학적 함의는 차별을 가지는 것 사이의 평형 혹은 다양성의 통일이다. 그러면 은 무엇인가. 그것은 같은 것에 같은 것을 더하는 것”, 곧 동일한 사물의 중복이다. 그 철학적 함의는 무차별의 동일성 혹은 추상적 단순성의 동일함이다. 위에서 드러난 사백의 중심사상은 조화야말로 실제로 사물을 낳는 근거이며, 완전히 동일하면 생산이 계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뛰어난 소박한 변증법의 명제이다. 그것은 세계가 다양성의 통일이며, 사물은 차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만약 이러한 점을 깨닫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그 차별성을 철폐하고 다양성을 말살하면 사물은 발전하지 못한다.

사백의 철학적 관점은 정치적 관점과 긴밀한 연관을 가지는 것이었으며, 혹자는 그것이 직접적으로 정치적 관점에 기여하는 것이라고도 말한다. 그는 조화야말로 실제로 사물을 낳는 근거이며, 완전히 동일하면 생산이 계속되지 않는다는 관점을 정치적 측면에서 운용하여 를 숭상하고 을 포기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조화를 버리고 자기에게 동조하기만을 구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정치적 측면에서의 는 주로 민주를 중시하고 각계의 상이한 의견을 들어야 함을 가리킨다. 이른바 신하를 뽑을 때에는 諫言하는 신하를 뽑아 많은 사물을 화합케 한다는 것이다. 정치적 측면에서의 은 주로 민주를 중시하지 않고 상이한 의견을 듣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이른바 나라의 왕은 이러한 것을 버리고 부화뇌동만을 일삼는다는 말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이러한 것를 가리키며, 또 용감하게 상이한 의견을 제시하는 諫臣(간신)을 가리킬 수도 있다. ‘부화뇌동을 가리키며, 간특하고 우매하며완고하고 비루한아첨하는 신하를 가리킬 수도 있다.

현재 중국에서 발표된 논저 중에는 조화야말로 실제로 사물을 낳는 근거이며, 완전히 동일하면 생산이 계속되지 않는다는 명제가 대립물 통일의 사상을 표현한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가령 關鋒(관봉)이것은 중국철학사상 최초로 철학적 개념을 사용하여 표현된 대립물 통일의 사상이다.”(關鋒 春秋哲學史論47.)고 하였다. 이러한 평가는 부정확한 것이며, 고대인을 너무 추켜세우고 있다. 마땅히 이 명제가 표현하고 있는 것은 다양성의 통일 사상이며, 거기에는 대립물의 통일 사상의 맹아가 포함되어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의 정의는 다른 것과 다른 것이 평정을 이루는 것이다. ‘다른 것이라는 말속에는 상이한 것’ ‘이외의 것’ ‘별다른 것이라는 등의 함의가 있으며, 일반적으로 대립적인 것’ ‘부정적인 것이라는 종류의 함의를 가지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다른 것과 다른 것이 평정을 이루는 것을 조화라고 한다는 명제는 대립물의 통일로 이해하는 것보다 다양성의 통일로 이해하는 것이 좀더 정확하다. 물론 이 다른 것속에는 반드시 첨예화되지 않은 긍정의 다른 것[]’과 부정의 다른 것[]’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조화야말로 실제로 사물을 낳는 근거이며, 완전히 동일하면 생산이 계속되지 않는다는 명제 속에는 대립물 통일 사상의 맹아가 내포되어 있다.

중국철학사에서 사백의 他和說中和學說의 최초 형식이다. 他和說의 대립, ‘상이한 것[]’를 포함하는 라는 것을 주요한 특징으로 한다. 그것의 철학사상은 사물의 차별성 혹은 다양성을 설명하며, 세계가 차별을 가진 것 사이의 평형 혹은 다양성의 통일임을 긍정한다. 漢初(한초)의 저작인 淮南子』 「說山訓에는 그러므로 같은 것끼리는 서로 다스릴 수 없으며, 반드시 다른 것을 기다린 이후에 완성된다는 말이 있다. 이러한 명제도 매우 효과적으로 他和說의 철학사상을 표현한다.

춘추시대 후기에는 의 상호대립과 상호의존을 주요한 내용으로 하는 否和說(부화설)’이 나타난다. 그 대표적 인물은 晏嬰(안영)이다. 春秋左氏傳』 「昭公(소공)20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나라의 임금[景公]이 사냥에서 돌아왔다. 晏子(안자)遄臺(천대)에서 임금을 모시고 있었다. 그 때 子猶(자유)가 수레를 몰고 달려 왔다. [景公]오직 梁丘據(양구거: 子猶의 이름)만이 나와 화합한다고 하였다. 晏子梁丘據는 주상[임금]과 동조하는 것이니 어떻게 화합한다고 하겠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 화합하는 것과 동조하는 것이 다른가?”하고 물었다. 晏子가 대답하였다. “다릅니다. 화합하는 것은 국을 끓이는 것과 같으니 물식초간장소금매실로 생선이나 고기를 익히고 땔나무로 불을 땝니다. 요리사는 그것을 조화시켜 맛을 조절하는데, 모자란 것은 더 집어넣고 지나친 것은 덜어냅니다. 군자는 그것을 먹고서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君臣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임금이 옳다고[] 여기는 일에도 옳지 않은 것[]이 있으면 신하는 그 옳지 않음을 이야기하여 옳은 것을 완성하며, 임금이 옳지 않다고 여기는 것에도 옳은 것이 있으면 신하는 그 옳음을 이야기하여 옳지 않은 것을 물리칩니다. 그것을 통해서 정치는 공평해져서 충돌하지 않게 되며, 백성들에게는 다투는 마음이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에 이르기를 맛을 조화시킨 국을 만들 때에는 요리사들을 경계시키고 맛을 공평하게 조절한다. (그것을 신에게 바칠 때) 음악을 연주한다면 (듣는 자가 감동하여) 아무런 말이 없을 것이고 어느 때고 다툼이 없을 것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선왕께서 다섯 가지 맛을 조절하고 다섯 가지 소리를 조화시킨 것은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정사를 완성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소리도 맛과 같습니다. (음악은) 하나의 , 두 개의 [陰陽], 세 개의 종류[높은 소리중간 소리낮은 소리], 네 개의 사물[여름가을겨울의 ], 다섯 가지 소리[], 여섯 개의 음률[십이율 중 양에 속하는 여섯 가지, 黃鍾(황종)大簇(대족)姑洗(고선)蕤賓(유빈)夷則(이칙), 無射(무사)], 일곱 개의 음계[다섯 가지 소리에 變宮(변궁)變徵(변치)를 더한 것], 여덟 개의 악기[대나무가죽나무로 만든 악기], 아홉 개의 노래[九功의 덕을 노래하는 것]로써 완성되는 것입니다. (음악은) 맑고 탁한 것, 작고 큰 것, 짧고 긴 것, 빠르고 느린 것, 슬프고 즐거운 것, 강하고 부드러운 것, 더디고 급한 것, 높고 낮은 것, 나가고 들어오는 것, 빽빽하고 성긴 것으로써 조절합니다. 군자는 이것을 듣고서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마음이 평온해지면 덕이 조화를 이룹니다. 그러므로 에 이르기를 덕스러운 소리에는 티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임금께서 옳다고 하는 것은 梁丘據도 옳다고 하고, 임금께서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은 梁丘據도 옳지 않다고 하니 이것은 물에 물을 타는 것과 같습니다. 누가 그것을 먹을 것이며, 또한 거문고와 비파가 한 가지 소리만 내는 것과 같으니 누가 그것을 듣겠습니까. 동조함의 옳지 못함이 이와 같습니다.

齊侯至自田 晏子侍于遄臺 子猶馳而造焉 公曰 唯據與我和夫 晏子對曰 據亦同也 焉得為和 公曰 和與同異乎 對曰異 和如羹焉 水火醯醢鹽梅 以烹魚肉 燀之以薪 宰夫和之 齊之以味 濟其不及 以洩其過 君子食之 以平其心 君臣亦然 君所謂可 而有否焉 臣獻其否 以成其可 君所謂否 而有可焉 臣獻其可 以去其否 是以政平而不干民無爭心 故詩曰 亦有和羹 既戒既平 鬷假無言 時靡有爭 先王之濟五味 和五聲也 以平其心 成其政也 聲亦如味 一氣 二體 三類 四物 五聲 六律 七音 八風 九歌 以相成也 清濁大小 長短疾徐 哀樂剛柔 遲速高下 出入周疏 以相濟也 君子聽之 以平其心 心平德和 故詩曰 德音不瑕 今據不然 君所謂可 據亦曰可 君所謂否 據亦曰否 若以水濟水 誰能食之 若琴瑟之專壹 誰能聽之 同之不可也如是

 

晏嬰은 사백과 마찬가지로 이 상반된 의미를 가지는 두 가지 개념이라고 생각하였다. 무엇을 이라고 하는가. 君臣 관계에서 그것은 임금께서 옳다고 하는 것은 梁丘據도 옳다고 하고, 임금께서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은 梁丘據도 옳지 않다고 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不同한 의견이 없으면 민주도 없다. 그것은 또 요리의 측면에서 물에 물을 타는 것으로 표현된다. 다른 성분이 없으면 아무도 그것을 먹지 않을 것이다. 음악의 방면에서 그것은 거문고와 비파가 한 가지 소리만 내는 것으로 표현된다. 한 가지 소리만 연주한다면 아무도 그것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의 철학적 함의는 무차별의 동일성 혹은 추상적 단순성의 동일함이다. 그러면 무엇을 라고 하는가. ‘는 한편으로 다양성과 다양성의 통일을 표시한다. 예를 들어 다섯 가지 맛을 조절하고 다섯 가지 소리를 조화시키는 것이라거나 소리도 맛과 같으니 (음악은) 하나의 , 두 개의 , 세 개의 종류, 네 개의 사물, 다섯 가지 소리, 여섯 개의 음률, 일곱 개의 음계, 여덟 개의 악기, 아홉 개의 노래로써 완성되는 것이라는 말이 그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는 대립물의 존재와 대립물의 통일을 표시한다. 예를 들어 “(음악은) 맑고 탁한 것, 작고 큰 것, 짧고 긴 것, 빠르고 느린 것, 슬프고 즐거운 것, 강하고 부드러운 것, 더디고 급한 것, 높고 낮은 것, 나가고 들어오는 것, 빽빽하고 성긴 것으로써 조절을 한다거나 모자란 것은 더 집어넣고 지나친 것을 덜어낸다는 말, 임금이 옳다고 여기는 일에도 옳지 않은 것이 있으면 신하는 그 옳지 않음을 이야기하여 옳은 것을 완성하며, 임금이 옳지 않다고 여기는 것에도 옳은 것이 있으면 신하는 그 옮음을 이야기하여 옳지 않은 것을 물리친다는 말이 그것이다.

여기에서는 맑음과 탁함, 더 집어넣음과 덜어냄, 모자람과 지나침,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 완성함과 물리침 등 십여 개의 대립에 관한 개념이 나타난다. 다양성의 통일로서 晏嬰는 사백의 개념을 발전시킨 것이다. 사백의 개념에 대한 규정은 다른 것과 다른 것이 평정을 이루는 것이었으며, 다른 것가운데에는 원래 옳은 것옳지 않은 것이 내재되어 있었다. 晏嬰은 명확하게 옳은 것옳지 않은 것의 대립을 통해서 를 규정하고 있으며, 그것은 인식의 진보이다. 많은 것[]’으로부터 많은 것 중의 두 가지 항[]’을 인식하고, ‘상이한 것[]’으로부터 상이한 것 중의 옳지 않은 것[]’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차별성으로부터 한발 더 나아가 차별성 중의 대립을 인식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晏嬰否和說가운데 이미 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정확하게 적중하는 의견은 종종 절대적인 긍정[]의 의견도 아니고 절대적인 부정[]의 의견도 아니며, ‘’ ‘의 상호대립과 상호의존을 통해 형성된 종합적인 의견일 수 있다. 아름답고 귀를 기울이게 하는 中和의 음악은 결코 거문고와 비파가 한 가지 소리만 내는 것이 아니라 맑고 탁한 것, 작고 큰 것, 짧고 긴 것, 빠르고 느린 것, 슬프고 즐거운 것, 강하고 부드러운 것, 더디고 급한 것, 높고 낮은 것, 나가고 들어오는 것, 빽빽하고 성긴 것으로써 조절을 한결과이다. 晏嬰은 또 모자란 것은 더 집어넣고 지나친 것은 덜어 내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거기에는 더 집어넣고 덜어 내는 두 가지 대립의 과정이 포함되어 있다. 모자라면 더 집어넣고 지나치면 덜어 내는 것을 통해서 사물은 中和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 공자는 일찍이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과 같다는 명제를 사용하여 그의 中和 사상을 서술하였다. 이러한 점은 晏嬰否和說他和로부터 中和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형태임을 보여 준다.

가장 먼저 中和 학설을 제기한 것은 공자였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중용의 이다. 공자도 사백이나 晏嬰처럼 의 상반된 의미를 인식하고, ‘를 숭상하고 을 배척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군자는 화합[]은 하지만 부화뇌동[]하지는 않고, 소인은 부회뇌동은 하지만 화합하지는 않는다.(論語』 「子路)”고 하였다. 여기에서의 부화뇌동[]’은 맹목적인 추종이며, 남이 말하면 자기도 말하는 따위이다. 또 여기에서의 화합[]’은 맹목적인 추종이 아니라 상이한 의견을 과감하게 제시하는 태도이다. 공자는 “(군주의 말이) 선하지 않은데도 그것을 거스르지 않으면 거의 한마디 말로 나라를 잃지 않겠습니까(論語』 「子路)”, “(임금을 섬길 때에) 속이지 말고 과감하게 ()한다.(論語』 「先進)”라고 하였다. 이것은 사백이 신하를 뽑을 때에는 諫言(간언)하는 신하를 뽑는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나 晏嬰임금께서 옳다고 하는 것은 梁丘據도 옳다고 하는것을 반대한 것과 동일한 사상적 노선에 속한다. 공자나 사백, 晏嬰를 숭상하고 을 배척하는 측면에서는 일치하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공자의 는 다양성의 통일로서의 인가, 아니면 대립물의 통일로서의 인가. 다음을 보자. 공자는 관대함으로 사나움을 보완하고 사나움으로 관대함을 보완하니 정치는 이로써 조화를 이룬다. 에 이르기를 다그치지도 않고 느슨하게 하지도 않으며, 강하게 하지도 않고 부드럽게 하지도 않는다. 정치를 할 때에는 조화를 이루어야 하니 그렇게 하면 모든 홍복이 이른다고 하였으니 조화의 지극함이다.(春秋左氏傳』 「昭公20)”라고 하였다. 여기에서의 다그침느슨함’, ‘강함부드러움의 상호대립과 상호의존은 晏嬰에 있어 ’ ‘의 상호대립, 상호의존과 동일한 인식의 수준에 속한다. 양자는 모두 초보적으로 대립성과 대립성의 통일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에 대한 공자의 인식에는 晏嬰을 뛰어넘는 면모가 있다. 그는 강함부드러움의 보완이 대단히 잘 이루어지면 의 지극함”, 곧 가장 적절한 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가장 적절한 의 상태가 곧 이다. ‘은 적중, 법도에 들어맞는다는 의미이다. 어떤 면에서 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이며, ‘은 가장 아름다운 라고 할 수도 있다. 論語』 「先進에는 자공이 (, 子張)와 상(, 子夏)은 누가 낫습니까라고 물었다. 공자는 는 지나치고 은 모자란다라고 대답하였다. 자공이 그러면 가 더 낫습니까라고 물으니 공자는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과 같다고 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이것은 비록 구체적인 일을 놓고서 논의된 것이지만 그 가운데에는 일종의 사유방법이 반영되어 있다. 즉 대립물의 통일[]은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과불급이 없는[] 상태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레닌은 변증법은 일종의 학설이다. 그것은 대립면이 어떻게 해야 같아지고 어떻게 같은 것으로 되는가를 연구한다.(철학 노트)”라고 하였다. 공자의 中和 학설은 바로 대립면이 어떻게 해야 같아지는가하는 문제를 탐구하는 데 귀중한 공헌을 하였다. 과거에 우리들은 공자와 儒家(유가)中和 학설을 형이상학으로 간단히 배척하였지만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공자와 儒家中和 사상은 네 가지의 일반적인 사유형식, ‘A이면서도 B이다’ ‘A이면서도 B가 아니다’ ‘A도 아니고 B도 아니다’ ‘A이기도 하고 B이기도 하다는 네 가지 사유형식으로 표현된다고 인식된다. 이 네 가지 사유형식은 대립면이 상호연결되는 네 가지 형식을 반영한다. 아래에서 나는 전국시대 말기 儒家의 중요한 사상인 荀子中和 사상을 결합시켜 대립면이 어떻게 상호연결되는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A이면서도 B이다:

荀子』 「王制편에는 그러므로 법만 있고 그것을 논의하지 않으면 법이 규정하지 못한 일은 반드시 폐하게 된다. 직무에 대한 규정만 있고 그것을 응용하지 않으면 직무에서 규정하지 못한 일은 반드시 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법이 있으면서도 그것을 논의하고 직무에 대한 규정이 있으면서도 그것을 응용하면 좋은 계교가 숨겨지는 경우가 없고 좋은 일이 감추어지는 경우가 없으니 모든 일에 잘못이 없게 된다. 군자가 아니면 할 수 없은 일이다. 그러므로 공평이라는 것은 정치의 저울대이고, ‘中和라는 것은 정치의 먹줄이다.”라는 기사가 있다. 여기에서 법이 있으면서도 그것을 논의하고 직무에 대한 규정이 있으면서도 그것을 응용한다.”는 것은 직무의 완전하지 못한 점은 반드시 그 대립면인 논의응용을 통해서 보완해야 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中和 사상의 가장 기본적인 형식의 하나이다. 곧 대립면을 직접 결합시켜 이것의 장점으로 저것의 단점을 보완하는 것이다.

 

A이면서도 B가 아니다:

荀子』 「不苟(불구)편에는 군자는 관대하면서도 태만하지 않고, 청렴하면서도 남을 해치지 않고, 분변하면서도 싸우지 않고, 명찰하면서도 과격하지 않고, 꼿꼿한 태도를 지키면서도 남에게 이기는 것을 구하지 않고, 굳세면서도 포악하지 않고, 부드럽고 순종하면서도 영합하지 않고, 공경하고 근신하면서도 조용한 모습을 지니니 이것을 일러 지극한 예모하고 한다.”는 기사가 있다. 이 말은 관대함, 청렴함, 분면함 등의 미덕은 언제든지 자신의 대립면으로 전환될 수 있으므로 반드시 태만하지 않음, 남을 해치지 않음, 다투지 않음 등으로 관대함, 청렴함, 분변함의 결점을 보완하여 그것이 극단적으로 흐르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A도 아니고 B도 아니다:

荀子』 「解蔽편에는 성인은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의 문제점을 알고 어느 하나에 가리우는 병폐도 보았기 때문에 원하는 것도 미워하는 것도 없고, 처음도 끝도 없으며, 가까이 하는 것도 멀리 하는 것도 없고, 박식을 추구하지도 무식을 추구하지도 않고, 옛날 것이라고 좋아하지도 요즘 것이라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단지 모든 사물을 나열해 놓고서 그것을 재는 표준을 내건다.”는 기사가 있다. 이것은 中和 사상의 전형적인 형식-두 개의 극단을 잡아서 그 가운데를 선택하는 것-이다. 어떤 사물에도 양단이 있으며, 따라서 어느 한 면만을 고집한다면 반드시 편면적인 것이 된다. 양단을 연결시키고 배합하여 과불급이 없이 법도에 적중할 때만이 두 개의 극단을 잡아서 그 가운데를 선택하였다고 할 수 있다.

 

A이기도 하고 B이기도 하다:

荀子』 「不苟편에는 군자는 남의 덕을 높이고 남의 아름다움을 선양하지만 그것은 아첨이 아니다. 정당하게 논의하고 숨김없이 지적하여 남의 잘못을 거론하지만 그것은 비난이 아니다.군자는 에 따라 처신하고 대응하기 때문이다.”라는 기사가 있다. 儒家때에 따라서 처신할 것을 주장한다. 곧 변화된 상황에 적응하여 상반된 대책을 취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간적 순서로는 A이면서도 B인 것으로 표현된다. 이것 역시 中和 사상의 한 형식이다. 즉 대립면의 상호보완과 상호협조이다.

춘추전국 시대에 中和 사상의 발전은 공자 한 사람 혹은 儒家 한 학파에만 공을 돌릴 수는 없다. 墨家(묵가)에게도 조화, 화합의 학설이 있다. 가령 墨子』 「兼愛()에서는 형제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조화되지 않는다.”고 하였고, 尙同에서도 떠나고 흩어지려는 마음이 있으면 서로 화합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管子에도 조화와 의 사상이 있다. 가령 管子』 「內業에는 배부르고 배고픔이 때에 맞는 것을 조화롭게 이루었다고 한다.”는 말이 있으며, 小匡(소광)에도 옥사를 다스릴 때에는 실상에 적중케 하여 무고한 사람을 죽이지 않고 죄 없는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물론 中和 학설에 대해서는 儒家의 논술이 다른 학파보다 더 체계적이다. 더욱이 禮記』 「中庸中和 사상을 우주관의 고도로까지 올려 놓았다. 그것은 이라는 것은 천하의 큰 근본이고, 라는 것은 천하의 통달한 이다. 中和를 이루면 천지가 자리잡고 만물이 자라난다.”고 말한다. 이것은 中和가 세계의 가장 보편적인 법칙임을 의미한다.

中和 학설에 결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그것은 대립의 전개를 법도의 범위 이내에 한정하며, 轉化의 필연성과 필요성을 부인한다. 이러한 점으로 인해 그것은 대립을 소멸시키고 모순을 융해시키는 調和主義 사상으로 발전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종합적으로 볼 때 中和 학설에는 변증법 사상이 빛을 발하고 있다. 그것은 대립물의 통일이라는 법칙의 한 측면, 즉 대립물의 상호의존과 상호연관의 측면에 대해서 상당히 상세한 분석과 서술을 진행하였다. 그러므로 中和 학설이 陰陽 학설, 五行 학설과 마찬가지로 중국 고대 변증법 사상의 중요한 구성요소 중의 하나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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