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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130 역사문화탐방이야기(10) 사림파의 뿌리를 가보다 (밀양 김종직 선생 생가)

문촌 장익수(메인즈)

흔히들 지역 모임이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정치와 종교는 사람들 사이에 싸움을 일으키기 때문에 드러내 놓고 이야기 하는 것을 금지하는 분위기를 만들곤 합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있어서 사람들이 행동하도록 만드는 가장 중요한 동력 중의 하나가 자신이 믿고 있거나 이루어 내기 위한 신념들입니다.

그 사람의 성향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철학입니다. 그리고 정치이고 종교입니다. 만약 그 요소들이 없다면 사람들은 잘 모이지도 않을 것이고 이해관계로 싸우지도 않을 것입니다.

무엇인가 첨예하게 대립할 때는 두가지 요소가 크게 작용하게 됩니다. 


"돈과 권력 그리고 신념"


민주주의로 제도화 된 우리 사회에서 경험할 수 밖에 없는 것들입니다. 입으로는 자유민주주의 사회라 하면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현상을 보게 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아이러니입니다. 

복잡한 한국 사회를 분석할 때 역사적으로 유명한 장소와 사람을 관찰하고 연구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했던 많은 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조선사회를 뒤흔든 철학...성리학자이며 사림파의 뿌리를 찾아 밀양으로 향해봅니다.


김종직

김종직(金宗直, 1431년 6월 ~ 1492년 8월 19일)은 조선시대 전기의 문신이자 사상가이며, 성리학자, 정치가, 교육자, 시인이다. 자(字)는 계온(季溫)·효관(孝盥), 호는 점필재(佔畢齋),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선산(善山, 일명 일선)이다. 세조 때에 동료들과 함께 관직에 진출하여 세조~성종 연간에 동료, 후배 사림파들을 적극 발탁하여 사림파의 정계 진출 기반을 다져놓았다.

1459년(세조 5년) 문과에 급제하여 출사 후 성종 초에 경연관·함양군수(咸陽郡守)·참교(參校)·선산부사(善山府使)를 거쳐 응교(應敎)가 되어 다시 경연에 나갔으며, 승정원도승지·이조 참판·동지경연사·한성부 판윤·공조 참판·형조 판서·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재지사림(在地士林)의 주도로 성리학적 정치질서를 확립하려 했던 사림파의 사조(師祖)의 한사람이자 중시조격이다. 그러나 세조의 즉위를 비판하여 지은 〈조의제문〉이 무오사화를 불러일으켰다. 조선왕조 수립 이후 성리학을 전승한 것은 길재, 권우였고, 사림파 출신으로 처음 조선정계에 진출한 이는 정몽주, 권근이었으나, 세조 이후 조선 조정에 본격적으로 출사한 것이 김종직과 그의 동료, 제자들이었으므로 김종직을 사림파의 실질적인 중시조로 간주한다.

김종직은 자신을 전별(餞別)하는 문인들을 '우리당'(吾黨)이라고 불렀는데 김종직을 종주로 삼았던 정치세력이 사림(士林)이다. 이를 통상 붕당 정치의 시원으로 간주한다.

정여창, 김굉필, 이목, 권경유, 김안국, 김정국, 김일손 등이 모두 그의 제자였고, 조광조는 김굉필의 제자로서 그의 손제자였으며, 남효온과 남곤, 송석충, 김전, 이심원 역시 그의 문하생이었다. 그는 세조의 찬탈을 비판하고 이를 항우의 초 회왕 살해에 비유한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지어 기록에 남겼으나 그 자신은 1459년(세조 5년)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가 벼슬이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출처_ 위키피디아




당시 김종직은 단종을 밀어낸 후 왕위를 빼앗은 세조에 대하여 조의제문을 올렸으나 세조의 통치기간에 과거에 나가 급제하여 관직을 얻었으니 이 또한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습니다. 

김종직이 죽고 나서 연산군 재위기간에 부관참시를 당했던 것은 권력에 우위를 점하고 있던 사림파에 대한 반목이 심해져 갔고 그 뿌리를 뽑기 위한 권력 핵심세력의 과욕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우리 남양주에서도 정당이든 지역 커뮤니티든 지역 패권주의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사람들간의 싸움은 큰 명분으로 싸움을 시작하기 보다는 사람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빈정되는 말이 그 불씨를 키우는 것 같습니다. 


최근 정당을 비하하는 대표적인 언어입니다.

"새누리당 - 새머리당(한나라당 - 딴라라당)
더불어 민주당 - 더불어 터진당"


그런데 그 당에 속한 사람들이나 지지자들 사이에서 이런 비하발언을 한 사람이 결국 서로간에 반목과 싸움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무오사화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던 것도 김일손이 이극돈이라는 중도보수적인 사람을 비하하는 언어에서 시작된 비극적 사건이었습니다. 

현재 남양주지역 온라인 커뮤니티 중 유일하게 정치적 견해의 표현이 자유로운 곳은 진접이야기(대표 : 최성민) 인 것 같습니다. 다른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정치인들의 홍보나 정치적 견해 표현이 원천적으로 봉쇄 당하는 입장입니다. 그래서인지 요즘 4월 총선을 앞두고 국회의원 예비 후보자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정치인들에게 공론의 장을 열어 놓을 때 상대방을 존중하는 자세로 서로를 대한다면 크게 염려할 것이 없는데 정당배경이나 지지가 다르다 하여 서로 싸우는 분위기를 만드는 정치 초보적 사고가 문제라 생각합니다.  


김종직이 한 시대를 풍미하며 사림파라는 거대 조직을 만들어 내고 세조 이후의 권력 구조에서 우위를 점하며 세력 확장의 기반을 마련한 것은 우리 사회의 정치구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권력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그 권력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 고리를 끊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권력과 돈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모여드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그러다가 그 두 가지가 자신에게서 떠나 갈 때 비로소 사람은 "권불십년, 인생무상"의 느낌을 받는 것 아닐까요? 


김종직 생가를 방문하며 느껴봅니다. 비록 한적한 시골이지만 잘 정돈되어 있는 유적지를 바라보니 한 없이 제가 사는 남양주가 아쉬워 집니다. 그 지역의 문화 컨텐츠를 향유할 수 있는 기회와 인식률을 높히고 타지역 방문객을 유치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가 역사와 문화재입니다. 남양주는 문화재가 풍성한 곳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세계적 인물 다산(열수) 정약용의 생가가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한 시대를 이끌어 왔던 실학이라는 학문을 정립한 사람의 본가가 남양주시 조안면에 위치해 있는 것도 눈여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역 사람들 사이에 시기와 질투가 많아질 때입니다. 

잘못된 정치환경이 만들어 낸 결과입니다. 

오늘은 누구를 만나든지 마음을 열어놓고 하루를 보내려 합니다. 잔잔한 물결에 돌을 던져도 물은 그 충격을 흡수하는 유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유연하지 않으면 결국 시기 질투 그리고 싸움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보내는 하루 하루는 누군가를 음해하고 깎아내리는 일보다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일이 많아지는 나날이 되어야겠습니다. 


무오사화에 대한 자료를 같이 올립니다. 

시간이 허락할 때 읽어보시고,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을 한 단계 발전시키고 미래 지향적인 곳으로 만들어 가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해 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오사화

무오사화(戊午士禍)는 1498년(연산군 4년) 음력 7월 유자광과 연산군이 김일손 등의 신진세력인 사림파를 제거한 사화이다. 사건이 일어난 1498년이 무오년이기에 무오사화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사초가 원인이 되었다하여 ‘史’(사)자를 넣어 한자로 무오사화(戊午史禍)라고도 표기한다.

사림파가 중앙에 등용되어 관계에 나오기는 성종 때부터이다. 성종이 경국대전을 반포하는 등 나라의 문물을 정비하려 널리 인재들을 찾자, 이를 기회로 사림파가 중앙에 진출하였다. 중앙에 진출한 사림파는 주로 삼사에서 은연한 세력을 갖게 되었다. 날이 감에 따라 이들은 종래의 벌족(閥族)인 훈구파를 욕심 많은 소인배라 하여 무시하기에 이르렀었고, 또 훈구파는 새로 등장한 사림파를 야생귀족(野生貴族)이라 하여 업신여기게 되었으니, 이 두 파는 주의·사상 및 자부하는 바가 서로 달라 배격과 반목이 그치지 않았다.


실록을 따르면 그 일의 발단은 사림파인 김일손(金馹孫)이 사간원 헌납으로 있던 적에 ‘극돈과 성준이 윗분의 뜻이라 하여 장차 우(牛)·이(李)의 당(黨)을 이루려 하네.’라며 다소 깔보는 투로 이극돈(李克墩)을 가축인 소에 비유하며 올렸던 소(蔬)였다.

이극돈은 중도보수의 점잖은 관료로 사림이니 훈구니 하는 대립으로부터 한발자국 떨어져 있었는데, 김일손으로부터 다소 모욕적인 언사를 받고나서 사림이란 무리에 크게 분노하였다. 분노한 이극돈이 이에 실록청을 열어서 김일손이 썼던 사초(史草)를 들여보니, 자신의 모자란 점을 썼을 뿐만 아니라 성종실록임에도 불구하고 성종의 할아버지인 세조적 일을 들추고 있었다. 이극돈이 보기에는 문장의 투 또한 그 먼젓번의 소와 별반 다를 바 없자 사림에 더욱 강한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극돈은 먼저 그와 가까운 벗인 어세겸(魚世謙)에게 “이런 무리를 가만히 두면 안 되겠다”고 말했으나 이극돈과 마찬가지로 중도보수 온건파였던 어세겸은 자칫하면 사람이 죽을지도 모르는 일에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이극돈은 어세겸에게 마음에 드는 도움을 받지 못하자 평소 알던 이 중 사림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유자광(柳子光)에게 이를 상의하였다. 유자광은 평소에 스스로는 협사(俠士)라 자처하고 김일손을 비롯한 이들을 글재주만 믿고 남을 업신여기는 무리들이라며 싫어하였으나, 마땅한 후원자를 만나지 못해 혼자 사림과 다투던 참이었다. 이러던 참에 이극돈이라는 후원자를 만나자 “이를 말씀입니까”라며 흔쾌히 반기었고 이극돈을 징검다리 삼아 몇명의 대신을 더 모아 도승지 신수근(愼守勤)에게 김일손의 일을 말하였다. 신수근도 외척이라는 점 하나만으로 자신을 업신여기는 문신들에게 불만이 있던 참에 이를 듣고 그도 연명(連名)하여 연산군(燕山君)에게 아뢰었다.


연산군(燕山君) 또한 즉위 이후로 줄곧 문사(文士)하고 신경전과 줄다리기를 벌이던 참에 유자광의 말을 듣고 나라를 위한 일이라 여겨 죄인을 심문하라 명했다.

유자광은 조정을 다시 여는 일이라며 심문하는 장내를 엄숙히 하고 평소 이를 벼려왔던 사림을 잡아들였다. 유자광은 신문장에 사림을 잡아오기만 하면 일이 술술 풀릴 줄 알았지만 일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이대로 가면 가벼운 처벌로 사림이 풀려날 것이라 여긴 유자광은 점차 초조해졌고 끝내 김종직(金宗直)을 죄인으로 만들기에 이른다. 김종직은 곧고 강직한 사림의 표본이었다. 워낙 바른 모습에 자발적인 추종자가 많은 사림의 정신적인 지주였고 유자광 또한 그에게 감화되었던 바 있었다. 유자광은 김일손을 반드시 잡아야 한다는 결단을 내리고 그의 후원자의 묵인 아래 김종직을 죄인으로 만들었다. 그때까지 버티던 김일손도 대선배격인 김종직이 죄인이 되자 자포자기하였고 유자광은 이에 득의만만해 했다.

득의만만해진 유자광은 이참에 김일손 뿐만 아니라 그와 반목했던 사림을 모조리 잡고자 했다. 김종직이 죄인이 된 마당에 김일손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못잡을게 있겠냐며 다른 사람들도 유자광에 동조하였다. 그러나 이미 큰 무리수를 두었다고 여긴 노사신(盧思愼)은 일이 더는 커지지 말아야 한다며 유자광을 말렸지만 사림과 오랜 반목이 쌓여있던 유자광은 노사신의 말을 듣지 않았다. 노사신이 계속 다른 의견을 내자 유자광은 얼굴을 붉히는데까지 이르렀고 노사신과 유자광 양자의 의견을 들은 연산군은 유자광의 손을 들어준다.

이 사건을 빌미로 사림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가해져 김종직의 제자로 조의제문을 실록에 실으려 했던 김일손 등 상당수의 사림 세력이 대거 처형을 당하거나 유배 또는 파면되었다. 연산군은 김일손 등을 심문하고, 우선 이 일파의 죄악은 모두 김종직이 선동한 것이라 하여,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그 시체의 목을 베는 부관참시형을 집행했다.

또한 김일손·권오복, 권경유, 이목, 허반 등은 간악한 파당을 이루어 선왕을 비방하였다는 죄를 씌워 죽이고, 강겸, 표연말, 홍한, 정여창, 강경서, 이수공, 정희량, 정승조 등은 난을 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귀양을 보냈다.

이종준, 최부, 이원, 이주, 김굉필, 박한주, 임희재, 강백진, 이계맹, 강혼 등은 김종직의 제자로서 붕당을 이루어 『조의제문』 삽입을 방조했다는 죄로 역시 귀양을 보냈다.

한편 어세겸, 이극돈, 유순, 윤효손, 김전 등은 수사관으로서 문제의 사초를 보고도 보고하지 않았다는 죄로 파직되었다.


이로써 사화 발단에 단서가 된 실록청 당상관들과 신진 사대부들이 숙청된 뒤 유자광은 그 위세가 더해져 훗날 갑자사화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사림파의 정계진출이 어려워졌으며 이는 연산군이 폐위된 까닭인 연산군의 측근정치를 가속화시킨다.

출처_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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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160326 역사문화탐방이야기(15) - 메밀 꽃 필무렵에 다녀온 이효석문학관 (강원도 평창군)

  4. 160313 역사문화탐방이야기(14) - 여인천하의 시대를 만든 문정왕후가 잠들어 있는 태릉(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5. 160224 역사문화탐방이야기(13) - 왕숙천 한가운데 아기자기하게 서 있는 알동산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6. 160214 역사문화탐방이야기(12) 의로운 삶을 살다간 장군을 찾아서...(의정부 정문부장군묘)

  7. 160209 역사문화탐방이야기(11) 화서학파의 뿌리를 찾아서 (화서 이항로 선생 생가)

  8. 160130 역사문화탐방이야기(10) 사림파의 뿌리를 가보다 (밀양 김종직 선생 생가)

  9. 160127 역사문화탐방이야기(9) 고구마 종자로 백성을 구하다 (원주 조엄선생묘)

  10. 160121 역사문화탐방이야기(8) 마재성지를 찾아서 (남양주시 조안면)

  11. 160114 역사문화탐방이야기(7) 조안면 금남리 이명준선생묘

  12. 151229 역사문화탐방이야기(6) - 원주 문막읍 벽계수 이종숙묘역

  13. 151228 역사문화탐방이야기(5) - 원주 운곡 원천석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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