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30 역사문화탐방이야기(35) - 삶의 가치관 (조선24대 왕 헌종)
항상 되돌아 본다. 내가 지금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지
내삶의 하루 하루 역사가 중요하다.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를 규정하고 미래의 내가 나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아는 것은 우리나라가 어떤 미래를 향해 가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척도가 된다.
헌종 당시의 시대상황은 그랬다.
조선왕조 500여년 가까이 유지되어 왔던 신분과 제도의 견고함이 조금씩 무너지면서 사람들이 생각을 하게된다. 기존의 질서에 메이지 않는 세상, 자신도 잘 살 수 있거나 제도권으로 진입이 가능하다는 희망은 사람들의 마음에 불씨를 남겨놓는다. 지금의 코로나와 같은 전염병으로 터전을 버리고 떠돌아다니거나 수해로 농사가 잘 되지 않아 배고픔이 이어지던 때였다.
동구릉은 9개의 조선왕릉이 있는 곳이다.
태조 이성계도 이곳에 묻혀있다.
헌종은 사회를 지배하는 주류계층에 맞서 나름대로 애썼으나 중요한 것은 당시 급격하게 변하는 국제정세에 민감하지 못했고, 너무나 강력한 안동김씨 세력으로 제대로 된 왕권을 쓰지도 못했다.
지금의 상황과 비슷하다.
검사와 판사 그룹의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완벽한 철문
지금의 정치지형은 두 가지다.
하나는 현정부의 개혁지지와 기존 제도적 장벽 제거다.
다른 하나는 개혁되고 싶지 않거나 특권 그리고 부의 축적과 연결된 권력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세력들의 방어다.
개혁과 수구
이 두가지는 영원히 변할 수 없는 동반자다. 정치지형은 그래서 생긴다.
사람은 누구나 이런 정치적 성향에 자유로운 지지가 가능하다. 그렇지만 자신이 지지하고 있는 제도나 정치가 사람을 미워하게 해서는 안된다. 누군가와 정책적 대립이 있다 해서 그 사람을 인간 이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남양주지역정치의 모습이었다.
과거에 진보적 정책을 지지했던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당보다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과거에 맹목적 지지를 보냈던 정당이 지금 그렇지 않은 것은 결국 정당은 견고한 카르텔 형성으로 건전한 정책제안이 불가능할 정도로 폐쇄적이고 새로운 사람이 들어가 활동하기 위한 진입장벽은 높다는 것 때문이다.
아마 헌종이 느꼈던 사회적 상황은 조선왕조의 몰락 이후에도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 기득권과의 싸움은 자신을 내어놓아야 한다. 아마 추미애 장관은 기득권(검찰,법원)과의 싸움에서 희생양이라는 생각이다. 본인이 맞아야 하는 칼침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대신해서 또는 자신의 신념을 과감하게 펼친 정치인이라는 것에 동의한다.
내가하면 로맨스
남이하면 불륜
공직을 맡은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자신을 지키는 일이다. "자승자강"
2010년이후 몇년동안 지역문화제를 정신없이 추진하다가 공연비는 제대로 지급해야 한다는 개인적 소신이 강했던 시절이었다. 교복문화제를 시작으로 연속 5회를 추진했던 문화제로 빚더미에 올랐었다. 그리고 고통이 시작되었다. 그 이후 한동안 1년 가까이 활동이 중단된 것을 이상하게 여기신 IT쪽 은사님이 전화를 했다. 그리고 1년 가까이 이어졌던 개인적 고통을 중단시켜주었다. 자신도 부유하지 않은데 선뜻 거액을 빌려주셨다. 매달 일정액을 무이자로 갚는 각서 하나만 썼다. 그리고 매달 빚진 마음으로 갚아 나가다가 커피숍을 운영하면서 2년 가까이 그러질 못했다.
며칠 전 은사님과 온라인으로 대화했다.
미안함 반, 고마움 반이지만 언제나 대화를 하면 위로의 말씀을 전해 주셨다.
이날도 나에게 전해 주신 말이다.
빚진 마음보다 내가 지금 잘 살고 있는지 늘 돌아보라고...그 말이 내 심장을 때린다. 어쩌면 내가 지금도 나보다는 타인을 좀더 마음에 두고 애쓰고 노력하는 이유다.
누군가에게 값없이 받은 큰 은혜
누군가에게 값없이 베풀며 살고 싶다.
"어떤 지식도 삶에서 드러나지 않으면 빛을 잃는다. 실천하지 않는 지식은 공허하다. 진정한 공부는 삶에서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고 실천을 통해 배우는 것이다. 지식은 배움으로 얻지만, 근본은 지식으로 바로 세울 수 없다. 지식보다 사람됨이 먼저다. p72 "
헌종이 살아갔던 시대적 상황
그리고 지금의 시대적 상황
크게 다르지 않지만 권력에 순응하기보다는 자신의 일상을 개혁해 나가며 사는 삶.
그런 삶을 살아내기 위해 하루 하루 실천과 배움의 징검다리를 쌓아 나가고자 한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고, 희망이 되는 일을 하다 아프리카 어느 한 곳에서 생을 마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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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종이 나라를 다스리던 시기는 조선 사회를 지탱해 왔던 신분 질서와 봉건 제도의 붕괴가 여기저기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때였다. 또 수해와 전염병 때문에 삶이 점차 어려워져 집을 버리고 떠돌아다니는 유민들이 급격하게 늘어났다.
이처럼 사회가 불안하다 보니 임금을 배반하여 군사를 일으킨 모반 사건이 2번에 걸쳐 일어났다. 1836년에는 충청도에 있던 남응중이 정조의 동생인 은언군의 손자를 임금으로 추대하고자 했으며 1844년에는 노론이었으나 몰락하여 중인이 된 민진용이 이원덕 등과 역시 은언군의 손자를 임금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2번의 모반 사건 모두 별다른 정치적 세력도 없는 중인과 몰락한 양반이 일으킨 것으로 이 시기에는 누구나 왕권에 도전할 수 있었을 만큼 임금이 우습게 여겨지고 있었다.
하지만 안동김씨의 세도를 막으려고 안동김씨를 군권과 주요판서자리에서 배제하고,김흥근을 유배보냈다.그렇지만 요절하여 아직 효력은 없었다.
특기할 만한일로 수령의 장죄에 대한 개선을 요구했고,과장의 폐단에 대해서 지적했다.
9년 동안의 친정 기간 동안 안동김씨의 세도를 꺾으려 했으며 민생 개선에도 나름대로 쓴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헌종은 국내는 물론, 조선 주변의 상황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으며 다가오는 열강 세력에 대한 대응책도 마련하지 못하였고, 여기에 날이 갈수록 강해지는 안동김씨 세력으로 인하여 정치를 제대로 할 수 없자, 자연히 호색(여색)을 가까이 하게 되었다. 가뜩이나 몸이 약해진 헌종은 병세가 더욱 악화하여 자리에 눕게 되었다. 결국 1849년 7월 25일 (음력 6월 6일) 오시 (오전 11시~오후 1시) 에 23세를 일기로 창덕궁의 중희당(重熙堂)에서 승하하였다.
헌종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일찍 승하하였고, 더군다나 헌종의 6촌 이내에 드는 왕족이 없었기 때문에 항렬로 따져 헌종 임금의 네 살 어린 7촌 아저씨뻘인 철종(사도세자의 서자 은언군의 손자)이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출처 _ 위키피디아